과자 하나를 집어 들고 뒷면을 봅니다.
원재료명: 밀가루, 설탕, 팜유, 코코아분말, 유청분말, 폴리소르베이트60, 카라기난, 이산화규소, DL-알라닌…
밀가루는 알겠어요. 설탕도요. 코코아분말, 괜찮습니다.
그런데 폴리소르베이트60은요? 카라기난은요?
외국 식당에서 메뉴판을 받았는데 사진이 없는 상황을 상상해 보세요. 글씨는 읽을 수 있지만 뭔지 모릅니다. “Ratatouille”가 스튜인지, 디저트인지, 음료인지.
성분표가 딱 그랬습니다. 한글로 쓰여 있는데, 한국어가 아닌 느낌이었어요.
식약처에서 내려주는 원재료 데이터에는 각 성분마다 코드가 붙어 있습니다. A코드라고 불리는 것인데, 대부분 영문 화학명 기반이에요.
Polysorbate 60. 유화제입니다. 기름과 물이 섞이도록 도와주는 역할이에요. 아이스크림이 부드러운 질감을 유지하는 데 쓰이기도 하고요.
이런 설명을 한 줄만 붙여주면, “이게 뭐지?”에서 “아, 그런 거구나”로 바뀝니다.
그 한 줄이 없으면, 성분표는 암호문이에요.
그래서 번역을 시작했습니다.
A코드 하나하나에 한국어 이름과 짧은 설명을 붙이는 작업이에요. “이 성분은 뭐고, 어떤 역할을 합니다” 정도의 한 줄 설명.
처음에는 전부 다 하려고 했습니다.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A코드가 수천 건이었거든요. 하나도 빠짐없이 번역하면 완벽하겠지, 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수천 건을 하나씩 검증하면서 번역하려면, 한 건에 3분만 잡아도 수백 시간이었습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분량이 아니었어요.
그때 떠오른 게 파레토 법칙이었습니다.
여행 준비할 때 외국어 회화책을 사면, 2만 단어가 들어있는 사전 대신 “여행에서 가장 많이 쓰는 200문장”이라는 책을 고르잖아요.
200문장이면 여행 대화의 대부분이 가능합니다. 나머지는 번역기를 꺼내면 되고요.
성분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었습니다.
실제로 세어봤어요.
우리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100만 개 제품에서 각 A코드가 몇 번이나 등장하는지 집계했습니다.
결과가 흥미로웠어요. 상위 200개 성분이, 전체 제품의 79%에서 나타났습니다.
수천 개 중에 200개. 그 200개만 번역하면 10명 중 8명 가까이는 성분표를 읽을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전부를 하려면 끝이 없고, 핵심만 하면 대부분이 해결됩니다. 완벽한 사전보다 좋은 여행 회화책이 더 실용적인 것처럼요.
번역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성분표에 성분이 20개 나열되어 있으면, 번역을 다 붙여놔도 읽기가 힘들어요. 정보가 많은 것과 정보가 정리된 것은 다른 문제니까요.
그래서 층을 나눴습니다. 3층짜리 건물처럼요.
1층에는 가장 중요한 것만 놓았습니다. “이 제품의 주인공 성분 셋”이에요. 과자라면 밀가루, 설탕, 팜유 같은 것들. 이것만 봐도 제품의 성격이 대충 보입니다.
2층에는 역할별로 묶어서 보여줬습니다. “맛을 내는 성분”, “형태를 잡아주는 성분”, “오래 보관하기 위한 성분”. 직무별로 팀을 나눈 것처럼, 성분도 하는 일이 다르거든요.
3층에는 주의가 필요한 것들을 모았습니다.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나, 근거가 확인된 기피 성분 같은 것들이요.
1층만 보면 30초, 2층까지 보면 1분, 3층까지 보면 2분.
급하면 1층만 보고, 궁금하면 내려가는 구조입니다.
200개 성분을 번역하고 나서 다시 화면을 열어봤어요.
“폴리소르베이트60”이 “유화제 (기름과 물을 섞어주는 역할)“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암호문 같던 성분표가, 이제는 조금이나마 읽히는 문장이 되었어요.
물론 나머지 21%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건 다음 단계에서, 조금 다른 방법으로 채워갈 생각이에요.
완벽하게 다 하는 것보다, 지금 당장 읽을 수 있게 하는 게 먼저였습니다.
외국어 메뉴판에 사진이 다 붙어있으면 좋겠지만, 일단 옆에 서서 “이건 스튜예요, 이건 생선구이예요” 하고 설명해주는 사람이 한 명 있는 것만으로도 식사는 가능하니까요.
다음 화에서는, 그 “설명해주는 사람”이 9명이 된 이야기를 할게요. 혼자서 만드는 서비스인데 팀원이 9명이라니, 이상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