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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냉장고 속 오래된 반찬통

회차: 22화

작고 소중한 파일럿 수준의 프로덕트였지만 어쨌든 배포하고 나면 그 다음엔 뭘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21화에서 “여기부터”라고 말했는데, 솔직히 그 다음 아침에 뭘 해야 할지 잘 몰랐어요. 검색이 되고, 성분 분석이 되고, 비교가 되고. 서비스가 돌아가기는 했거든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끝났다는 안도감보다 “이게 진짜 다인가?”라는 불안함이 더 크더라고요.

마라톤 완주 직후에, 관중석이 텅 비어있는 느낌이랄까요. 달리는 동안은 몰랐는데, 멈추고 나니 주변이 조용했습니다.


그러다 프로젝트 폴더를 정리하게 됐습니다.

한쪽 구석에 archive/라는 디렉토리가 있었어요.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던 건 아닙니다. 열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겁니다.

냉장고 깊숙이 넣어둔 반찬통 있잖아요. 분명 넣은 건 기억나는데, 언제 넣었는지가 가물가물한. 열면 괜찮을 수도 있고, 열면 후회할 수도 있는.

그게 notion으로 반응형 DB를 셋팅하고 페어런트/차일드 프로젝트와 태스크들로 나눠 관리했던 제 기획 문서 230개였습니다.


코드 한 줄 없이 기획만 했던 시절이 있었어요.

프롤로그에서 이야기했던 바로 그 시기입니다. AI에게 “이런 앱, 만들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더니 “물론이죠”라고 답하던 그때.

그 “물론이죠”에 힘입어, 3~4개월 동안 기획을 했습니다. AI 9명과 함께요. 서비스 설계, 화면 흐름, 기능 우선순위, 사용자 시나리오. 문서 105개, 태스크 230개.

planning-v3-final.md라는 파일 이름이 있었어요. v3에 final까지 붙어 있습니다. 그때의 열정이 느껴지죠. (그리고 약간의 과잉 자신감도요.)


반찬통을 열었습니다.

첫 번째로 눈에 들어온 문장이 이거였어요.

“원재료 매칭 신뢰도가 0.9 이상이면 ‘확인됨’으로 표시한다.”

읽는 순간 웃음이 나왔습니다.

6개월 전의 저는, 매칭 신뢰도가 시험 점수처럼 0점에서 100점 사이를 부드럽게 오간다고 상상했던 것 같아요. 92점이면 꽤 확실하고, 73점이면 좀 불안하고, 그런 느낌으로요.

실제로 매칭 시스템을 만들고 나서 데이터를 열어보니, 신뢰도 값은 딱 네 종류였습니다.

1.0, 0.95, 0.85, 0.7.

그게 전부예요.

오븐 온도를 1도 단위로 조절할 계획을 세웠는데, 정작 우리 집 오븐에는 “강/중/약/해동” 네 칸짜리 다이얼만 있었던 거예요.

0.9로 선을 긋겠다는 건, 그냥 위 두 개와 아래 두 개를 나누는 것과 같았습니다. 기획서에서는 정교해 보였던 규칙이, 실제 데이터 앞에서는 의미를 잃었어요.


용기를 내서 230개를 전부 현재 코드와 대조해봤습니다.

한 명이 이식 계획을 세우고, 다른 한 명이 “정말 가능한가” 감사하는 방식으로요. (네, 둘 다 AI입니다. 이제는 익숙해지셨죠.)

결과가 재미있었어요.

8개는 이미 구현되어 있었습니다. 기획서를 보지 않고 만들었는데, 도착한 곳이 같았어요. 여행 계획 없이 걸었는데 원래 가려던 카페 앞에 서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4개는 아이디어는 맞았지만 모양이 틀렸습니다. “신뢰도 배지”라고 기획했던 건, “매칭 방식 배지”가 되었어요. 같은 목적지인데 다른 길로 간 셈이죠.

2개는 때가 아니었습니다. 좋은 생각이었지만, 아직 갖춰지지 않은 것들이 있었어요. 씨앗은 좋은데 밭이 준비가 안 된 상태랄까요.

1개는 폐기했습니다. 기획할 때는 몰랐던 규제 현실 때문이었어요. (이건 다음 화에서 자세히 이야기할게요.)


230개 중 15개. 생존율 6.5%.

처음에는 좀 허무했습니다. 3~4개월의 기획이 6.5%라니.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230개가 없었으면 지금의 서비스도 없었을 거예요.

기획은 지도가 아니었습니다. 지도는 “A 교차로에서 우회전, 300미터 직진” 하고 알려주지만, 기획은 “대충 저쪽이 북쪽이다”라고 알려주는 나침반에 가까웠어요.

나침반 덕분에 방향은 맞았고, 그래서 기획서를 들여다보지 않았는데도 8개가 자연스럽게 구현될 수 있었던 겁니다.

6개월 전의 저에게서 온 편지를 읽은 기분이었습니다.

“네가 고민했던 것들, 꽤 많은 부분은 이미 해냈더라. 다만 네가 상상했던 모양과는 좀 달라.”


반찬통을 열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졌어요.

과거의 기획은 정리가 되었고, 현재의 서비스는 돌아가고 있었고, 이제 진짜로 “여기부터”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다만, 그 시작이 생각보다 당혹스러운 질문에서 출발하게 됩니다.

“데이터는 잔뜩 쌓여 있는데… 화면은 왜 이렇게 비어 보이지?”

그 이야기는 다음 화에서요.